
일제 식민시대에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에게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민족의 혼 또는 얼을 지키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해방되고, 선진국으로 호명되는 현재에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과 별개일 수 없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도 가벼운 일도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 말이 중국 말과 달라 언어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위해 우리 말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강한 민족정신이 유전자처럼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글로 옮길 수 있는 문자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는 기호의 일종으로서 다른 기호들과 함께 발명되었다. 문명이 발달하는 것과 기호가 많아지고 정교해지는 것은 맞물려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한글만이 아니라 외국 문자를 접하고 있고, 다양한 표지판에 도식으로 나타내어 우리의 행동에 지침을 제공하는 다양한 기호에 접하고 있고, 이외에도 숫자와 다양한 수식에 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글만 배워 익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다만, 어떤 기호도 한글을 사용하여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글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만큼 한글은 우리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 매체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것은 한글이라는 기호로 표현하는 글이 아니라 한글이라는 기호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말부터 접하고 글을 접하며, 말부터 할 수 있게 되고,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은 삶에서 가장 기초적이다. 말과 달리 글은 별도로 배워 익혀야 읽고 쓸 수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세상살이 측면에서 보면 생존에 필수적이어서 부모는 자녀가 글을 읽고 쓰는 것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글살이에 입문하도록 조력한다. 이때 부모의 반복적인 지도와 자녀의 반복적인 학습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글자를 보고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수준에서 글자를 제대로 발음하고 쓰는 수준에 이르는 과정이 사후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과정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활동에도 수준이 있어 이후로 이 수준을 높여 나가는 노력이 계속 이어진다. 이 수준의 끝은 원칙적으로 열려 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게 기초적이어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생애 초기에 완성된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우리가 삶에서 기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와 수준에 따라 상대적이다. 사람이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는 어느 시대에나 동형적이지만, 각각의 행위 절차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기초적인 것과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 기초적인 것에도 동형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이 있다. 사람이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는 어느 장소에서나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동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성하고 변화시켜 온 행위 절차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수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보기에 낮은 수준은 기초적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그 수준은 기초적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 기초적이다.
우리의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부문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분화된 상태로 진전되어 왔고, 각 부문 내에서도 하위 단위들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분화된 상태로 진전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복잡한 양태를 띠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황이 변하면서 연동하여 변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 때문에 우리는 기초적인 것 중에서도 기초적인 것을 기본으로 배워 익히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이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 중 하나가 글을 읽고 쓰는 기초로서의 문해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에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보건의 맥락에서 적합한 방역을 할 줄 아는 것이 생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는 디지털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 음식점에 가서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것도, 인터넷을 매개로 다양한 주문이나 예약을 하는 것도,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다가 순서가 되어 일을 보는 것도 디지털 기반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휴대하고 다니는 휴대폰은 인터넷과 접속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어서 휴대폰 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무한대에 이른다. 여기에 연계된 앱은 지금도 계속 계발되고 있다. 정부 각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정부 각 부처에서는 그것들을 국민이 생활하는 데 기초적인 것들로 인식할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토대 위에서 국민이 생활하는 데 기초적인 것을 아는 것을 ‘생활문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치거나 병들 수도 있으므로 건강문해와 의료문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이동하는 데 교통을 이용하므로 교통문해도 생각할 수 있다. 점점 더 매체가 다양해지고 있으므로 미디어문해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므로 법률과 관련한 기본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법률문해도 생각할 수 있다. 환경오염의 문제가 심각하고, 생태계 파괴의 위험이 있고, 기후변화를 예의주시하고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환경문해, 생태문해, 기후문해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나열해 보면, 생활문해는 계속 확대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생활문해의 수준을 적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간단한 과제는 아니다. 이에 관한 공론은 이제 겨우 그 필요성을 인식하는 단계에 있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조만간 공론이 활성화될 것으로 예견된다.
생활문해는 어느 한 시점의 문해가 아니라 우리 삶의 과정 전체에서 필요로 하게 되는 문해라는 점에서 ‘평생문해’의 맥락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해는 평생의 시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또한, 문해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문해에도 수준이 있어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향상의 과제가 있다는 점에서 문해에 대한 논의는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배워 익혀야 하는 시점에서 이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문해자’라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의 주장은 생활문해의 관점에서 경청할 만하다.<끝>